어느 가톨릭 사제의 참선수행(參禪修行) 체험기

 

 

1. 글을 시작하며

 

지난 주 서명원 신부님의 특강은 모처럼 독특한 자리였던 것 같다. 단지 가톨릭 신부 한 사람이 불교에 매료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그런 분위기와 더불어 일반인이 아닌 출가자 신분인 사제(司祭)의 불교관(佛敎觀)에 대한 호기심을 반영하듯 모처럼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겪었던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근본적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불교라기보다는 본인의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불교를 수용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의 대중화를 위해 고민하고 접근하려는 경향이 짙은 분이었지만 아무튼 간화선을 출가자 중심의 수행에서 벗어나 재가불자들을 위한 수행으로 확장시켜 나가야한다며 그 당위성을 역설하시는 대목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서명원 신부와 경우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선(禪)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실상을 살펴보고 미래의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가도와끼 가끼찌(門脇 佳吉)이라는 일본인 가톨릭 사제의 참선체험기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2. 어느 가톨릭 사제의 참선수행기

 

1)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제나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의 자기>가 내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삶과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 수행에 정진하여 <본래의 자기>에 눈뜸에 따라 본래의 자기와 일체인 그리스도교적 삶에도 눈뜨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2) 내가 선(禪)에서 배운 것은 우선 학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선(禪)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공통적인 근본성격을 요약한다면 몸과 마음을 바쳐 구도(求道)에 정진함으로서 <참된 자기>를 자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학문적 지식과 종교적 체험의 불균형으로 고민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禪)에서 배운 것입니다.

 

3) 성서와 공안(公案)은 다음과 같은 접에서 구조상 비슷합니다. ...... 중략......,

불트만(Rudolf Bultmann)이 말하고 있듯이 성서의 메시지가 인간을 자기이해(自己理解)로 인도하는 것과 비슷하게 공안은 자기구명(自己究明), 곧 본연의 자기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안이 좌선 및 독참(獨參)과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성서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묵상, 영적 지도, 교회의 교도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톨릭교회는 초창기부터 강조해 왔습니다.

.......중략....., 성서의 메시지는 이성의 통상적인 작용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선과 독참을 통해 공안을 공부하면 이성을 초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공안 공부는 성서의 신비를 푸는 데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교가 원죄의 교의(敎義)로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사실상 선(禪)에서도 인정하고 그것을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와 선(禪) 양쪽이 다 인정하고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불교용어로 말하면 번뇌망상(煩惱妄想)이라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용어로 말하면, 원죄의 결과로서 칠죄종(七罪宗), 즉 교오(交惡), 인색(吝嗇), 색욕(色慾), 탐욕(貪慾), 분노(憤怒), 질투(嫉妬), 해태(懈怠) 등 일곱 가지 죄원(罪源)이 우리 마음속 깊이 깃들여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며, 선(禪)이나 그리스도교나 그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5) 벽암록에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공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궁극에 있어서 근원적인 하나로 귀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귀착합니까? 근원적인 하나란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고, 선(禪)에서는 무(無) 혹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장에서 근원적인 하나는 아마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만물은 궁극적으로 이 하나에 귀착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적 교리입니다.

 

3. 글을 마치며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명상이나 참선수행이 불교에만 국한된 독특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교에서도 묵상이나 영성수련(靈性修鍊) 또는 영신수련(靈神修鍊) 등을 통한 일종의 접신의식(接神意識)의 전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신(神)과의 교감을 갈망하던 신도들이 조용히 자신을 관조함으로서 뜻밖에도 자신의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신(神)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단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만이 그들의 전통에 없던 독특한 수행방법이기에 다른 어느 수행법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간화선 자체는 신앙이 아니라 궁극적인 자아탐구의 도구이기 때문에 단지 그 방법만을 자신의 신앙 속으로 수용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한계로 인해 의식화된 기성세대, 즉 타 종교인 또는 무종교인 —명상이나 참선수행은 이미 종교적 차원을 떠나 현대인의 여가활동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으로의 간화선 보급이 결코 불교의 실질적 포교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문화의 공격적 보급이 지금 당장 불교신도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잠재적 신도인 미래세대의 의식 속에 불교문화를 친숙한 것으로 자리잡게 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서명원 신부의 생각과 달리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간 불교계에서는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같은 대중화를 위한 기반조성 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성과물들은 마치 완상품(玩賞品)처럼 진열대에 갇혀있을 뿐 일상의식 속에서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서명원 신부가 지적하는 것은 대중화를 위한 형식적 노력의 부재가 아니라 실질적 활용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보다 세속화된 의식만이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불교의식의 세속화이며, 불교의식의 세속화만이 불교의 대중화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주장이 서명원 신부님께서 우리 불교계에 던진 화두가 아닐까 싶다.